여행을 마치며
모스크바 공항에서 환승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다. 인천으로 가는 비행기까지 5시간 정도 남았다. 러시아가 무비자 입국이 가능하면 잠시 나갔다 오겠지만, 현실은 너그럽지 않았다. 공항에서 5시간을 꼬박 보내야 했다. 모스크바 공항은 규모가 크다. 편의 시설도 많아서 시간 보내는데 큰 어려움을 없을 것 같다. 단지 콘센트가 자주 보이지 않아 노트북 충전에 애를 먹을 것 같다. 빈 의자에 앉아 지인들에게 보낼 메일을 쓰고 있으니 이곳이 러시아라는 생각은 금방 잊혀졌다. 흔한 공항 풍경이 되어 시간을 보낼 따름이었다.
생각해보면 인천 공항을 떠나는 비행기를 기다릴 때도 필자는 흔한 공항 풍경의 일부였다. 탑승 시간을 기다리며 노트북을 따닥거리고 있는 모습은 곁눈질도 필요 없는 평범한 풍경이었다. 그런 풍경에서 시작됐던 여행이 어느새 5개월이 지났다.
처음으로 도착했던 인도는 2년 전과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새로이 정비된 공항이나 포장 도로가 깔린 여행자 거리를 보면서 2년이라는 세월을 실감할 수 있었다. 하지만 2년 이라는 시간이 지났음에도 인도에 대한 감상은 2년 전과 비슷했다. 그야말로 카오스. 혼돈이라는 한자어를 사용하는 것은 좀 고상한 면이 있으니 카오스라고 표현하는 것이 가장 적절하겠다. 서로 간의 사이가 짐작 되지 않는 빈부 격차, 횡단보도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도로 사정, 사람들이 짐짝처럼 취급되는 기차역, 여행자들을 노리는 사기꾼들. 모두가 인도의 풍경이었다. 그런 풍경 사이로 여행자들을 선의로 대하는 현지인, 쌓인 세월 만큼 빛을 발하는 유적지, 감탄이 절로 나오는 자연 경관들이 필자를 맞아줬다.
특히 남인도 여행을 하면서 북인도와 다른 유적지들을 많이 볼 수 있어서 좋았다. 인도의 유적지라고 한다면 힌두교, 자인교 유적지와 이슬람 유적지를 꼽을 수 있다. 이중 힌두교, 자인교 유적지는 인도 전역에 다양하게 분포되어 있다. 한편 이슬람 유적지는 주로 북인도에 후기 유적지가 남인도에 전기 유적지가 분포되어 있다. 타즈마할이나 레드포트 등으로 유명한 유적지의 원형이 남아있는 곳이 바로 남인도 인 셈이다. 또한 남인도에는 북인도와 다른 형태의 힌두교, 자인교 사원들이 있었다. 무엇보다 힌두교 사원의 원형으로 꼽히는 유적지가 남인도에 남아있었다. 점차 더워지는 날씨에 서둘로 네팔로 도망가긴 했지만, 위에서 언급한 다양한 유적지들을 볼 수 있어서 좋았다.
하지만 3월이 넘어가면서 그렇게 좋은 인도도 돌아다니기 괴로워졌다. 인도 여행의 최적기인 겨울이 끝나고 봄이 다가오고 있었다. 필자는 다가오는 인도의 봄을 피해서 네팔로 도망쳤다. 네팔에서는 주로 포카라에서 머물렀다. 카트만두는 작은 델리 라고 불릴 만큼 소란스러웠기 때문이다. 포카라에 머물면서 처음으로 4000M 넘어가는 산에 올라가는 트레킹도 하고, 현지인 집으로 소풍도 가고, 한가롭게 보트 위에서 낮잠도 자면서 시간을 보냈다. 무엇보다 ABC 트레킹 했던 경험이 가장 소중하게 기억된다. 시도하기 전에 포기하지 말고, 힘들어 보여도 도전하면 할 수 있다는 것을 체험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물론 카트만두도 좋았다. 인도에서 보기 드문 목조 유적지를 볼 수 있어서 좋았다. 게다가 인도에서 먹고 싶었던 라멘을 먹을 수 있는 식당이 있어서 좋았다. 아무튼 네팔은 인도에서 지친 몸과 마음을 쉬게 하는 여행지로 기억된다.
네팔을 떠나 다음 여행지로 삼은 곳은 터키였다. 처음 한국에서 계획 했던 다음 여행지는 동남아였다. 캄보디아를 제외한 동남아를 좀 더 자세히 보고 싶었다. 하지만 다가오는 동남아의 여름은 인도의 여름에 지지 않는 대마왕 이라는 소문에 계획을 변경했다. 그리스 유적지와 유럽의 유적지를 동시에 볼 수 있다는 터키로 향하기로 했다. 두바이를 경유해 가는 야간 비행기를 타고 도착한 이스탄불은 매우 활기찬 도시였다. 다양한 민족들이 북적거리며 생활하고 있는 도시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물가가 비쌌다. 숙박비, 교통비, 식비 모두가 비쌌다. 인도, 네팔을 기준으로 더블룸 숙소는 대략 6000~10000원 정도 였다. 하지만 터키에서는 이 정도로 도미토리도 찾기 힘들었다. 식비나 교통비 역시 2~3배 차이 났다. 결국 인도, 네팔에서 아꼈던 여행 경비를 터키와 동유럽을 여행하면서 까먹었다.
여행 이야기로 돌아와서 이스탄불에 대해서 이야기해보자. 이스탄불은 유럽과 아시아가 만나는 중간지점에 있는 도시로 유명한 곳이다. 그 만큼 다양한 유적지들이 남아있다. 흑해 연안을 따라 여행하면 만날 수 있는 이슬람 유적지, 지중해 연안을 따라 여행하면 만날 수 있는 그리스 유적지, 주로 이스탄불에 남아있는 교회들이 그것이다. 특히 인도와 다른 이슬람 유적지는 그야말로 감동이었다. 블루 모스크로 대표되는 돔 형태의 모스크는 내면과 외면이 모두 예술이었다. 완벽한 대칭을 추구한 외면과 정갈한 장식이 남아있는 내면을 보고 있으면 절로 마음이 경건해졌다. 무엇보다 디브리이에 남아있는 모스크와 병원은 석조 예술의 최고봉에 속하는 유적지들이었다. 그런 유적지를 직접 볼 수 있었다는 사실에 지금도 감사한다.
이렇게 흑해 연안에서 이슬람 유적지를 감상했다면, 지중해 연안을 따라 그리스 유적지를 감상할 차례다. 캄보디아의 타프롬 처럼 폐허로 남은 유적지부터 지금도 공연 목적으로 이용되고 있는 유적지까지 다양한 형태의 유적지를 볼 수 있었다. 그 중에서 아프로도시스에서 봤던 경기장과 그 박물관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미드 '스파르타쿠스'를 보고 난 직후여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대학교 운동장 만한 경기장에 잡초가 무성한 모습은 말로 하기 힘든 애틋함이 묻어 났다. 세월의 무상 이라는 걸까.
이슬람 유적지와 그리스 유적지를 보는 동안에 어느새 1달이 지났다. 원래 필자의 여행 스타일이라면 터키 같은 도시에서는 2달 정도 시간을 보내는 것이 보통이었다. 하지만 길게 느껴졌던 5개월 중 4개월이 지나가자 어느새 마음이 급해졌다. 터키 여행을 서둘러 접고 동유럽으로 향했다. 지금 생각하면 어리석은 결정이었다. 아니, 유럽에 대해서 알게 됐으니 어느 정도 수확은 있었다고 해야겠다. 하지만 다시 계획을 세우라고 한다면 터키에서 좀 더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동유럽이 필자에게 큰 매력이 없었던 이유는 동유럽 여행지가 모두 비슷해 보이기 때문이었다. 터키에서 만난 선배 여행자 한 분도 그런 충고를 해주었다.
'1달 정도 시간을 유럽에서 보내기 보다는 발칸 반도를 여행하는 것이 더욱 보람찰 것이다. 유럽 지역은 그 지역이 그 지역 같아서 2주 이상 시간을 보내면 식상하기 쉽거든.'
처음에는 이 충고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여행지에 대한 감상이야 개인마다 다르고, 내가 각별하게 느끼면 될 일 아닌가.'
싶은 마음에 곧장 동유럽으로 향했다. 그리고 터키를 떠나 도착한 불가리아, 세르비아를 여행하는 동안에 선배가 해줬던 충고를 뼈 저리게 느꼈다. 이건 여행이 아니라 일상이었다. 처음에는 신기해 보였던 유럽식 건물도 금새 식상해졌다. 유적지들 역시 비슷한 유적지가 되풀이 되고 있었다. 비슷한 유적지에 비슷한 숙소에 비슷한 식사- 어느새 여행이 일상이 되고 있었다. 다행히 부다페스트의 아경이 그런 일상을 타파하는 열쇠를 안겨줬다. 가이드북이나 인터넷 자료를 통하지 않고 직접 겪는 경험에서 감동은 얼마든지 찾을 수 있었다. 결국 자기가 생각하기 나름이라는 단순한 결론 이랄까. 덕분에 부다페스트의 야경을 보면서 느꼈던 감동은 지금도 가슴에 잔잔히 남아있다. 되풀이 되는 일상 속에서 얼마든지 감동을 찾을 수 있다는 사실과 함께 말이다.
- 러시아 공항에서 환승을 기다리며 -
2012/07/10 - [2012 동유럽] - 06/21 부다페스트 야경
방문해주셔서 감사합니다.View on 도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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